Insight

02. 그대 안의 붓다.

limuz 2011. 2. 26. 22:34
그대 안의 붓다
Osho 반야심경 강의
그대 안의 붓다

그대 내면의 붓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觀世音)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 그대는 미처 모르고 있겠지만,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만 그대는 붓다이다. 아무도 붓다 이외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불성(佛性)은 그대 존재의 본질적 핵심이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대는 불성으로부터 나왔다. 불성은 원천인 동시에 목적이다. 우리는 불성으로부터 와서 불성으로 되돌아간다. 이 '불성'이라는 하나의 낱말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불성은 삶이라는 원(圓)을 완결짓는다.
불성은 알파(alpha)에서 오메가(omega)까지 일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대가 붓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자신이 이미 붓다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대자신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면 그뿐이다. 그대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본래면목과 직면하면 불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본래 면목을 보게 되는 날, 온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는다. 특정한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한 개인이 깨달을 수 있겠는가? 특정한 '한 사람'이라는 개념자체가 깨닫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나'가
깨닫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에 앞서 '나'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나'가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내가 깨닫는 날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의 순간 이후로 나는 붓다 이외의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수 많은 형태와 이름을 갖고 있으며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붓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주삼라만상이 붓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여기 이렇게 많은 붓다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니 참으로 기쁘다. 그대가 내가 있는 이 곳으로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대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출발점이다.

그대의 가슴 속의 자리잡은 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그대자신의 불성에 대한 사랑과 존경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신뢰는 그대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대자신에 대한 신뢰이다. 나를 신뢰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옴으로써 그대는 그대자신과 가까워질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다이아몬드는 이미 거기에 있다. 다만 그대가 잊고있을 뿐이다. 또는 애초부터 그 다이아몬드에 대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 에머슨(Emerson)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 말에 동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통찰력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제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이 말에는 분명히 통찰력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다소 전도(顚倒)되어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신이다. 인간은 움트고있는 붓다이다.
싹은 진작부터 존재했으며, 이 싹은 언제라도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다만 얼마간의 노력, 약간의 도움만 있으면......이 도움이 애초에 없었던 것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의 노력은 다만 그것을 드러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미 거기 감춰져 있던 것을 밝혀낼 뿐이다. 이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진리는 이미 거기에 있다. 진리는 영원한다.

이 경문(經文)들을 주의깊게 들어라. 이 경문들이야말로 불교 문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경문들은 심경(心經;The Heart Sutra)이라고 불려진다. 이 경전은 불교의 가르침 중에 심장부인 것이다.

나는 아주 처음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불교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대 자신이 붓다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라. 어쩌면 이 말이 뻔뻔하게 들리거나 허무맹랑한 가설(假說)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대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기가 힘들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대가 붓다라는 이 사실을 하나의 씨앗으로 그냥 놔두어라. 이 사실을 둘러싸고 많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사실을 중심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그대는 이 경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전에 실린 경문들은 말할 수 없이 강력하다. 아주 간결하고 함축적이지만 씨앗과 같은 잠재력을 간직하고 있다. 그대가 붓다라는 사실을, 싹트고있는 붓다라는 사실을 하나의 토양으로 삼아라.

그대가 생성되어가는 존재로서 어머어마한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라. 아무 것도 결여된 것이 없다.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이치에 맞게 정리하는 것 뿐이다. 조금 더 많은 각성과 의식이 필요할 뿐이다......보물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는 내면의 집 안에 작은 등불 하나만 밝혀놓으면 된다. 일단 어둠이 사라지면 그대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다.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대는 위대한 황제가 된다. 왕국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을 거지로 믿는다면 이런 선언은 불가능하다. 자신을 거지로 생각하는 한 이 선언은 꿈조차 꿀 수 없다. 유사 이래 수 많은 성직자들이 "너는 거지이다. 너는 무지하다. 너는 죄인이다."라는 관념을 주입시켜 왔다. 그대는 깊은 최면에 걸려버렸다. 이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 최면 상태를 파괴하기 위해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대들 모두가 붓다이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그대의 모든 노력은 허사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이런 이해를 묵시(默示)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그렇지않으면 그대는 길을 잃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라. 이런 관점이 "나는 붓다이다."라는 일종의 에고를 만들어낼까봐 염려하지 말라.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 이 반야심경의 모든 구절이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줄 것이다.
오직 에고만이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은 실재한다.

세상은 환상이며 영혼만이 실재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나' 만이 진실이며 다른 모든 것은 환상이고 마야(maya)일 뿐이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붓다는 정반대로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만이 허위이며 다른 모든 것은 실재이다. 나는 붓다의 관점에 동의한다. 붓다의 통찰력은 매우 예리하다. 가장 깊이 꿰뚫어보는 안목이 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붓다의 통찰력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만큼 깊고 높은 차원을 꿰뚫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대는 붓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작하라. 그대 몸의 세포 하나하나, 마음 속의 모든 상념들이 이 사실을 선언하게 하라. "나는 붓다이다!"라는 이 선언이 그대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게 하라. 그리고
'나'라는 에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이 문제는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

'나'와 불성(佛性)은 공존할 수 없다. 불성이 드러나면 '나'는 자취를 감춘다. 불을 밝히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반야심경의 경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약간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의 불교 경전은
일곱 가지의 사원에 대해 말한다. 수피(Sufi)들이 일곱 개의 골짜기를 언급하고, 힌두교에서 일곱 개의 차크라(Chakra)를 말하는 것과 같다.

첫번째 사원은 육체의 사원, 두번째는 심리-신체(psycho-somatic)의 사원, 세번째는 심리학적(psychological) 사원, 네번째는 심리-영적(psycho-spiritual)인 차원, 다섯번째는 영적(spiritual)인 사원, 여섯번째는 영성-초월의(spiritual-transcendental)의 사원이다. 그리고 일곱번째로 궁극의 사원, 사원 중의 사원은 초월(transcendental)의 사원이다.

이 반야심경은 일곱번째 사원에 해당한다. 이 경전은 일곱번째 사원에 든 자,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자의 선언이다. 이것이 '프라즈나 파라미타(prajna-paramita)'라는 산스크리트어(語)의 의미이다. 프라즈나 파라미타, 즉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초월의 세계에 대한 지혜, 저 피안(彼岸)의 경지로부터 온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든 종류의 동일시(同一視)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낮은 것이나 높은 것, 이 세상이나 저 세 상을 막론하고 모든 동일시에서 벗어났을 때, 결코 아무 것에도 동일시되지 않을 때 이 지혜가 찾아온다. 각성의 불꽃이 연기조차 없이 순수하게 타오를 때 반야바라밀다라는 지혜가 찾아든다. 이런 까닭에 불교인들이 이 아주 작은 경전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불교인들이 이 경전을 심경(The Herat Sutra)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 경전은 종교의 핵심, 종교의 심장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번째 육체의 사원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물라다르 차크라(muladhar chakra)에 대응한다. 두번째 심리 신체의
사원은 스바디스탄 차크라(svadisthan chakra), 세번째 심리학적 사원은 마니뿌라 차크라(manipura chakra),
네번째 심리 영적인 사원은 아나하타 차크라(anahatta chakra), 다섯번째 영적인 사원은 비슈드하 차크라(vishudha chakra), 여섯번째 영성 초월의 사원은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 일곱번째 초월의 사원은 사하스라르 차크라(sahasrar chakra)에 대응한다. '사하스라르'는 일천 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을 의미한다. 이 연꽃이 궁극적인 개화(開花)의 상징이다. 감추어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 모든 것이 드러나고 현현(顯現)된 상태이다. 일천 장의 꽆잎을 가진 연꽃이 활짝 피어났다. 하늘 전체가 이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 그 축복으로 충만하다.

현대 세계는 인간의 가장 내밀(內密)한 핵심을 탐구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이 현대의 노력이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파블로프(Pavlov)와 스키너(B.F.Skinner)를 비롯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계속해서 육체적 사원, 즉 물라다르 차크라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은 육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첫번째 육체의 사원에 얽매여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오직 물질적 육체를 통해서만 인간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그들은 좀더 고차원적인 영역에 대해 열려있지 않다. 애초부터 육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단정해 버리면 탐구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런 태도는 편견으로
굳어진다. 공산주의자, 막시스트(Marxist), 행동주의 심리학자, 무신론자들은 "인간은 육체일 뿐."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 자체가 더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가는 문을 닫아 버리고, 마침내 그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물론, 물질은 분명히 존재한다. 물질은 가장 명백한 현상이므로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다. 물질적 육체는 분명히 존재하므로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증명할 필요도 없는 이유로 해서 육체만이 유일한 실체로 인정된다. 이것은 완전히 넌센스(nonsense)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모든 존엄성을 상실한다.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성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면 삶에는 어떠한 존엄성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로 전락한다. 이때 그대는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대에게는 육체 이상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육체에 불과하다. 그대는 먹고, 배설하고, 섹스하고, 아기를 낳을 것이다. 이런 일을 되풀이 하다가 어느 날엔가 덧없이 죽을 것이다. 세속적이고 하찮은 일이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그러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시(詩)와 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스키너는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Beyond Freedom and Dignity]라는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넘어서'라는
말대신 [자유와 존엄성의 아래로:Below Freedom and Dignity]라고 불려져야 옳다. 이 책은 자유와 존엄성 이하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에 대해 가장 저차원적이고 추악한 관점을 표방하고 있다. 이것을 명심하라. 육체에는 아무 것도 잘못된 게 없다.

나는 육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육체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다만 육체를 전부라고 여기는 그 생각이 추한 것이다.
인간은 일곱 개의 칸을 가진 사다리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첫번째 칸에 동일시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데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사다리는 이 세상과 피안(彼岸)의 세계를 이어준다. 이 사다리는 물질과 신을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사다리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사용되기만 한다면 첫번째 칸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만일 이 첫번째 칸을 딛고 올라갈 디딤돌로 여긴다면 이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이다. 이때 그대는 육체에 감사를 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다리의 나머지 여섯 부분을 잊고 오로지 첫번째 칸을 숭배하기 시작한다면, 사다리 전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첫번째 단계에 갇혀 버린다면,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그 칸은 더 이상 하나의 단계가 아니다. 하나의 단계는 다른 단계와 이어질 때에 한해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칸은 사다리 전체의 일부일 때에 한해서 칸이 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더 이상 칸이 아니라면 그대는 거기에서 막혀
버린다.
물질적인 사람들은 항상 경직되고 고착되어 있다. 그들은 항상 무엇인가 결여되었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원을 그리고 돌고있을 뿐이며 매번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그들은 지치고 권태를 느낀 나머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뭔가 자극적인 것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뭔가 새롭고 신선한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삶에 무슨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
가? 우리가 열중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장난감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