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목마른 사람들
내 사랑 인디아
India, My love
인도는 단순히 지리학이나 역사에 속하는 나라가 아니다. 인도는 단순히 하나의 민족, 국가, 지구의 일부가 아니다. 인도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인도는 하나의 은유이며 시(詩)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확실하게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인도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에너지로 진동하고 있다.
거의 만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의식의 궁극적인 정상에 도달했다. 그들의 진동은 아직 살아 있다. 그들의 영향력이 공기 중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나 이 불가사의한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그 무엇,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인도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나라이다. 인도는 단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진리의 탐구가 그것이다. 인도는 위대한 철학자들을 낳지 못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인도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칸트, 헤겔, 브래들리(Bradley), 버트란트 러셀 같은 인물들을 낳지 못했다. 인도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단 한 명의 철학자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인도는 진리를 탐구해 왔다!
인도인들의 탐구는 다른 나라에서 행해진 것과 분명히 달랐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진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진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가? 그대는 진리를 알거나 모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생각은 불가능하다. 진리에 대한 철학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부질없고 헛된 망상이다. 그것은 장님이 빛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그가 위대한 천재나 논리학자라 해도 아무 소용없다. 빛을 보는 데에는 천재성이나 논리가 필요 없다.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빛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가능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도에는 '철학(philosophy)'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진리의 탐구를 인도에서는 '다르샨(darshan)'이라고 부른다. 이 '다르샨'이라는 말은 '봄(見)'을 의미한다.
철학은 생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각은 맴을 도는 것과 같다. 계속해서 주변을 맴돌 뿐, 결코 경험에 이르지 못한다.인도는 진리를 알고 진리 자체가 되는데 전력을 기울인 단 하나의 땅이다. 인도는 자신이 가진 재능 전부를 여기에 바쳤다. 인도의 역사 전체를 살펴보아도 단 한 명의 위대한 과학자가 없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없었던 게 아니다. 천재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인도에도 수학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은 없었다. 이 나라 전체가 객관적인 연구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 나라에서는 타자(他人)를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만년이라는 세월 동안 인도인들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이 탐구를 위해 과학, 기술 발전, 경제적인 부유함 등 모든 것을 희생했다. 가난과 질병, 죽음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탐구를 포기하지 않았다......이것이 어떤 분위기를 창조했다. 사방을 바다처럼 메운 특별한 진동을 창조했다.
조금이라도 명상적인 마음을 갖고 인도에 온 사람은 이 진동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관광객으로 온 사람은 그것을 느낄 수 없다. 그는 폐허가 된 유적들, 궁전, 타즈 마할(Taj Mahal), 사원들, 카주라호(Khajuraho), 히말라야를 보겠지만 진짜 인도는 보지 못할 것이다. 인도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진짜 인도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 진짜 인도의 진동은 모든 곳에 충만해 있다. 그러나 그는 민감하지 않다. 이 진동을 느낄 만큼 수용적이지 않다. 그는 진짜 인도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인도가 남긴 잔해들, 그 해골을 보려고 온 것이다. 그는 인도의 영혼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사진기로 그 해골들을 찍어서 앨범을 만든다. 그리고 그는 "나는 인도에 갔었다. 나는 인도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사진기로 담을 수 없는 영적인 면이 있다. 그대가 받아 온 교육, 그대가 받아 온 훈련에 의해서는 그것을 포착할 수 없다.
그대는 어떤 나라를 가든 그 나라 사람들, 그 나라의 역사, 그 나라의 과거를 만날 수 있다. 완벽하게 만날 수 있다. 독일, 이태리, 프랑스,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안된다. 만일 인도를 다른 나라와 똑같은 범주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이미 핵심을 놓친 것이다. 그 나라들에는 영적인 오라(aura)가 없다. 그들은 고탐 붓다를 낳지 못했다. 그들은 마하비라, 네미나타(Neminatha), 아디나타(Adinatha)를 낳지 못했다. 그들은 까비르(Kabir), 파리드(Farid), 다두(Dadu) 같은 인물을 낳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위대한 과학자와 시인, 예술가들을 낳았다. 그들은 위대한 화가들을 낳았다. 그들은 온갖 재능 있는 사람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는 인도의 독점물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신비주의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그는 단순히 천재가 아니다. 단순히 위대한 화가이거나 시인이 아니다. 그는 신의 전령(傳令)이다. 그는 신을 초대하는 사람이다. 그는 신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준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열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신성한 기운으로 충만하다. 내게 보는 한, 이 기운이 진정한 인도이다. 그러나 이것을 알려면 특별한 마음 상태가 필요하다.
명상할 때, 침묵에 잠겨 들어갈 때, 그대는 진짜 인도가 들어와 그대와 만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대는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진리를 이 가난한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나라는 너무나 가난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받았다. 눈을 떠서 이 유산을 보는 순간 그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아마 이 나라는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오직 의식의 진화에만 깊이 몰두한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여러 가지 많은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향해 왔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의식을 신과 만나는 지점까지 진화시키느냐, 어떻게 인간과 신을 더 가깝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단 하나의 지향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였다. 하루나 한 달, 일 년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수 천년에 걸친 문제였다. 따라서 이 나라를 둘러싸고 엄청난 에너지의 장(場)이 창조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에너지가 사방을 덮고 있다. 그대가 준비만 하면 된다.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누구나 갑자기 인도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동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록에 나와 있듯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다. 2천 5백 년 전에 피타고라스가 진리를 찾아 인도에 왔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인도에 왔다.
유사이래, 지구 방방곡곡에서 구도자들이 이 땅을 찾아왔다. 인도는 가난하다. 물질에 관한 한 인도는 줄 것이 없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도는 지상에서 가장 풍요한 땅이다. 이 풍요함은 내면의 풍요함이다. 이 나라는 가난하다. 그러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보물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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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단순히 하나의 나라가 아니다
내 사랑 인디아
India, My love
오쇼처럼 인도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철학, 역사, 정치, 문학, 그리고 영적인 차원과 순수하게 감정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인도에 대한 오쇼의 이해는 다차원적이다. 그는 인도에 대해 탁월한 이해를 보여준다. 그의 이해는 언어를 초월하여 진실한 사랑의 영역까지 들어간다. 오쇼는 모든 것의 핵심에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메시지이다. 그는 사랑을 통해 삶을 발견하고, 경험하고, 맛보라고 말한다.
-프리티쉬 난디(Pritish Nandy), 저널리스트.
1931년 12월 11일부터 1990년 1월 19일까지 이 지구를 방문했던 오쇼는 수정처럼 투명한 통찰력으로 이 중요한 이야기들을 전개한다. 그는 진리의 모든 면을 파헤치면서,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잠들어 있던 우리의 의식을 일깨운다. 그는 고대의 성자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깨어 있는 의식으로 미래를 준비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인도가 밝힌 의식의 횃불이 꺼지기 않게 하라고.
-라구 라이(Raghu Rai), 사진 작가-
오쇼는 결코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물이다. 금세기의 가장 탁월한 인물인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해 새로운 세계, 사랑의 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즐기고 되찾을 수 있는 세계를 열어 주었다. 여기, 시대를 관통하는 지혜의 에센스가 있다. 언젠가 죽을 운명인 우리 인간이 불멸을 얻을 수 있는 지혜의 감로수가 여기 있다.
-나라얀(Mr. V. N Narayan, 델리, 힌두스탄 타임스의 편집장
이 빛나는 우화들은 크나 큰 기쁨을 안겨 준다. 이 책을 천천히 읽어라. 사랑으로!
-지트 타일(Jeet Thayil), 저술가, 시인, 아시아 위크(Asiaweek)의 기고가-
세상에 비폭력 정신을 선사한 인도가 그 영적인 전통을 회복할 때가 되었다. [인디아 마이 러브]는 이 시대를 위해 꼭 필요한 기념비적인 가르침이다.
-말리카 사라바이(Mallika Sarabhai), 인도 고전 무용가.
오쇼가 보는 인도.
눈부시게 빛나는 인도, 어둡고 황폐한 인도, 소달구지가 굴러가는 고대의 인도, 눈부시게 발전하는 현대의 인도. 과연 어느 것이 인도인가? 인도는 한 장소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의 개념? 한때 황금의 새처럼 비상하던 나라? 인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수많은 흐름과 지류, 신비주의자, 황제들, 비길 데 없이 훌륭한 장인과 천상의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가들. 설령 내가 인도를 안다 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인도를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디까지 내 상상력을 잡아늘일 수 있을까?
인도는 하나의 패러독스(paradox)이다. 모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만일 논리를 고수한다면 인도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적재적소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도에 1주일을 머문 사람은 책을 한 권 쓸 수 있다. 인도에 한 달을 머문 사람은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인도에 몇 년이나 그 이상을 체류한 사람은 한 단락을 쓰기도 힘들 것이다. 이렇듯 인도는 엄청나게 복잡한 나라이다. 인도의 모순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한편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중산층의 소비자들이 급격하게 등장하고 있다. 인도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두루 퍼져 있는 나태함은 인도의 물질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도는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고질적인 카스트 제도, 족벌 체제,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등으로 정치는 부패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 보면, 이런 병폐의 근본 원인은 업(業)과 환생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이다. 수 천년 동안 이어 내려온 인도의 모순은 이 '환생'이라는 개념을 숙명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의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핵심을 말하자면, 인도는 특정한 범주에 속하는 어떤 용어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인도는 단순히 하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는 신비이다.
인도는 위풍 당당한 반얀(banyan) 나무의 신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대(大) 성당의 기둥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가지를 땅에 뿌리박고 있는 반얀 나무! 또는 아침 이슬처럼 청초하게 떠오르는 연꽃의 신비에 비유될 수 있다. 섬세하면서도 숭고한 연꽃.
인도는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인 현상이다. 어린아이들이 경험하는 깊은 경이감과 놀라움이 살아 있는 곳이다.
인도에 대해 말할 때 오쇼의 말투는 더 부드러워지지만 권위가 흘러 넘친다. 그는 인도의 핵심을 드러낸다. 그는 지리학적인 인도나 역사적인 인도에 관심이 없다. 그는 인도가 가진 내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히말라야처럼 멀고 높은 곳도 우리의 숨결 마냥 가깝게 느껴진다. 무지개처럼 미묘하면서도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것이 인도에 대한 그의 사랑이다.
오쇼의 독창적이고 예리한 통찰력은 인도의 영적인 전통을 풍성하게 가꾸어 준 깨달은 스승들의 정수(精髓)를 밝혀 준다. 인도의 과거 전체를 보는 그의 자애로운 시각은, 물질적인 진보와 일시적인 성공에 들떠 있는 오늘날의 이 나라에서도 진정한 지혜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의 시각에 의하면 물질적인 목표는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현대의 인도가 영원한 영적 탐구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것이야말로 인류 문명에 기여한 인도의 독특한 공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는 신부를 찬양하는 신랑처럼 인도를 찬미한다. 부드러운 손길, 그의 손길은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선율과 같다. 그의 시선은 수줍음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신부에게 고정되어 있다. 그는 인도를 광대한 바다, 무한한 다양성을 가진 곳으로 본다. 그는 인도를 스스로 에너지를 창조하는 곳으로 본다. 숨어 있는 꽃과 같은 깨달은 스승들, 이 오래된 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준 깨달은 스승들 위에 오쇼는 자신의 영혼의 빛을 비춘다. 인도에 대한 오쇼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의 통찰력은 인도의 영적인 면을 깊이 탐구한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지적인 차원에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다양한 차원에 걸친 인도의 진보를 고찰한다.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난 통합적인 의식으로 그는 인도를 직접 파고든다. 그는 인도의 본질을 반영한다. 그는 인도의 의식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써 오쇼는 우리가 인도를 발견하고, 보고, 듣고, 느끼는데 도움이 되도록 풍성한 일화를 사용한다. 다양한 일화와 통찰력을 통해 인도를 조명하면서 오쇼는 각각의 미묘한 뉘앙스와 차이점, 각각의 색채를 드러내 준다. 여기엔 놀랍도록 투명한 이해와 유희성이 깃들어 있다. 그는 인도를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을 열어 준다.
오쇼는 인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인도를 알기 때문이다!
-스와미 사티야 베단트(Swami Satya Vedant)-
철학 박사. 오쇼 국제 재단 내, 오쇼 멀티버시티(Osho Multiversity)의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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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안의 붓다
Osho 반야심경 강의
그대 안의 붓다
그대 내면의 붓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觀世音)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 그대는 미처 모르고 있겠지만,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만 그대는 붓다이다. 아무도 붓다 이외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불성(佛性)은 그대 존재의 본질적 핵심이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대는 불성으로부터 나왔다. 불성은 원천인 동시에 목적이다. 우리는 불성으로부터 와서 불성으로 되돌아간다. 이 '불성'이라는 하나의 낱말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불성은 삶이라는 원(圓)을 완결짓는다.
불성은 알파(alpha)에서 오메가(omega)까지 일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대가 붓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자신이 이미 붓다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대자신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면 그뿐이다. 그대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본래면목과 직면하면 불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본래 면목을 보게 되는 날, 온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는다. 특정한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한 개인이 깨달을 수 있겠는가? 특정한 '한 사람'이라는 개념자체가 깨닫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나'가
깨닫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에 앞서 '나'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나'가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내가 깨닫는 날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의 순간 이후로 나는 붓다 이외의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수 많은 형태와 이름을 갖고 있으며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붓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주삼라만상이 붓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여기 이렇게 많은 붓다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니 참으로 기쁘다. 그대가 내가 있는 이 곳으로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대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출발점이다.
그대의 가슴 속의 자리잡은 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그대자신의 불성에 대한 사랑과 존경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신뢰는 그대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대자신에 대한 신뢰이다. 나를 신뢰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옴으로써 그대는 그대자신과 가까워질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다이아몬드는 이미 거기에 있다. 다만 그대가 잊고있을 뿐이다. 또는 애초부터 그 다이아몬드에 대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 에머슨(Emerson)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 말에 동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통찰력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제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이 말에는 분명히 통찰력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다소 전도(顚倒)되어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신이다. 인간은 움트고있는 붓다이다.
싹은 진작부터 존재했으며, 이 싹은 언제라도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다만 얼마간의 노력, 약간의 도움만 있으면......이 도움이 애초에 없었던 것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의 노력은 다만 그것을 드러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미 거기 감춰져 있던 것을 밝혀낼 뿐이다. 이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진리는 이미 거기에 있다. 진리는 영원한다.
이 경문(經文)들을 주의깊게 들어라. 이 경문들이야말로 불교 문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경문들은 심경(心經;The Heart Sutra)이라고 불려진다. 이 경전은 불교의 가르침 중에 심장부인 것이다.
나는 아주 처음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불교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대 자신이 붓다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라. 어쩌면 이 말이 뻔뻔하게 들리거나 허무맹랑한 가설(假說)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대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기가 힘들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대가 붓다라는 이 사실을 하나의 씨앗으로 그냥 놔두어라. 이 사실을 둘러싸고 많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사실을 중심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그대는 이 경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전에 실린 경문들은 말할 수 없이 강력하다. 아주 간결하고 함축적이지만 씨앗과 같은 잠재력을 간직하고 있다. 그대가 붓다라는 사실을, 싹트고있는 붓다라는 사실을 하나의 토양으로 삼아라.
그대가 생성되어가는 존재로서 어머어마한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라. 아무 것도 결여된 것이 없다.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이치에 맞게 정리하는 것 뿐이다. 조금 더 많은 각성과 의식이 필요할 뿐이다......보물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는 내면의 집 안에 작은 등불 하나만 밝혀놓으면 된다. 일단 어둠이 사라지면 그대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다.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대는 위대한 황제가 된다. 왕국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을 거지로 믿는다면 이런 선언은 불가능하다. 자신을 거지로 생각하는 한 이 선언은 꿈조차 꿀 수 없다. 유사 이래 수 많은 성직자들이 "너는 거지이다. 너는 무지하다. 너는 죄인이다."라는 관념을 주입시켜 왔다. 그대는 깊은 최면에 걸려버렸다. 이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 최면 상태를 파괴하기 위해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대들 모두가 붓다이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그대의 모든 노력은 허사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이런 이해를 묵시(默示)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그렇지않으면 그대는 길을 잃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라. 이런 관점이 "나는 붓다이다."라는 일종의 에고를 만들어낼까봐 염려하지 말라.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 이 반야심경의 모든 구절이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줄 것이다.
오직 에고만이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은 실재한다.
세상은 환상이며 영혼만이 실재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나' 만이 진실이며 다른 모든 것은 환상이고 마야(maya)일 뿐이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붓다는 정반대로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만이 허위이며 다른 모든 것은 실재이다. 나는 붓다의 관점에 동의한다. 붓다의 통찰력은 매우 예리하다. 가장 깊이 꿰뚫어보는 안목이 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붓다의 통찰력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만큼 깊고 높은 차원을 꿰뚫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대는 붓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작하라. 그대 몸의 세포 하나하나, 마음 속의 모든 상념들이 이 사실을 선언하게 하라. "나는 붓다이다!"라는 이 선언이 그대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게 하라. 그리고
'나'라는 에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이 문제는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
'나'와 불성(佛性)은 공존할 수 없다. 불성이 드러나면 '나'는 자취를 감춘다. 불을 밝히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반야심경의 경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약간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의 불교 경전은
일곱 가지의 사원에 대해 말한다. 수피(Sufi)들이 일곱 개의 골짜기를 언급하고, 힌두교에서 일곱 개의 차크라(Chakra)를 말하는 것과 같다.
첫번째 사원은 육체의 사원, 두번째는 심리-신체(psycho-somatic)의 사원, 세번째는 심리학적(psychological) 사원, 네번째는 심리-영적(psycho-spiritual)인 차원, 다섯번째는 영적(spiritual)인 사원, 여섯번째는 영성-초월의(spiritual-transcendental)의 사원이다. 그리고 일곱번째로 궁극의 사원, 사원 중의 사원은 초월(transcendental)의 사원이다.
이 반야심경은 일곱번째 사원에 해당한다. 이 경전은 일곱번째 사원에 든 자,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자의 선언이다. 이것이 '프라즈나 파라미타(prajna-paramita)'라는 산스크리트어(語)의 의미이다. 프라즈나 파라미타, 즉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초월의 세계에 대한 지혜, 저 피안(彼岸)의 경지로부터 온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든 종류의 동일시(同一視)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낮은 것이나 높은 것, 이 세상이나 저 세 상을 막론하고 모든 동일시에서 벗어났을 때, 결코 아무 것에도 동일시되지 않을 때 이 지혜가 찾아온다. 각성의 불꽃이 연기조차 없이 순수하게 타오를 때 반야바라밀다라는 지혜가 찾아든다. 이런 까닭에 불교인들이 이 아주 작은 경전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불교인들이 이 경전을 심경(The Herat Sutra)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 경전은 종교의 핵심, 종교의 심장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번째 육체의 사원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물라다르 차크라(muladhar chakra)에 대응한다. 두번째 심리 신체의
사원은 스바디스탄 차크라(svadisthan chakra), 세번째 심리학적 사원은 마니뿌라 차크라(manipura chakra),
네번째 심리 영적인 사원은 아나하타 차크라(anahatta chakra), 다섯번째 영적인 사원은 비슈드하 차크라(vishudha chakra), 여섯번째 영성 초월의 사원은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 일곱번째 초월의 사원은 사하스라르 차크라(sahasrar chakra)에 대응한다. '사하스라르'는 일천 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을 의미한다. 이 연꽃이 궁극적인 개화(開花)의 상징이다. 감추어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 모든 것이 드러나고 현현(顯現)된 상태이다. 일천 장의 꽆잎을 가진 연꽃이 활짝 피어났다. 하늘 전체가 이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 그 축복으로 충만하다.
현대 세계는 인간의 가장 내밀(內密)한 핵심을 탐구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이 현대의 노력이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파블로프(Pavlov)와 스키너(B.F.Skinner)를 비롯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계속해서 육체적 사원, 즉 물라다르 차크라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은 육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첫번째 육체의 사원에 얽매여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오직 물질적 육체를 통해서만 인간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그들은 좀더 고차원적인 영역에 대해 열려있지 않다. 애초부터 육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단정해 버리면 탐구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런 태도는 편견으로
굳어진다. 공산주의자, 막시스트(Marxist), 행동주의 심리학자, 무신론자들은 "인간은 육체일 뿐."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 자체가 더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가는 문을 닫아 버리고, 마침내 그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물론, 물질은 분명히 존재한다. 물질은 가장 명백한 현상이므로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다. 물질적 육체는 분명히 존재하므로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증명할 필요도 없는 이유로 해서 육체만이 유일한 실체로 인정된다. 이것은 완전히 넌센스(nonsense)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모든 존엄성을 상실한다.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성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면 삶에는 어떠한 존엄성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로 전락한다. 이때 그대는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대에게는 육체 이상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육체에 불과하다. 그대는 먹고, 배설하고, 섹스하고, 아기를 낳을 것이다. 이런 일을 되풀이 하다가 어느 날엔가 덧없이 죽을 것이다. 세속적이고 하찮은 일이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그러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시(詩)와 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스키너는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Beyond Freedom and Dignity]라는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넘어서'라는
말대신 [자유와 존엄성의 아래로:Below Freedom and Dignity]라고 불려져야 옳다. 이 책은 자유와 존엄성 이하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에 대해 가장 저차원적이고 추악한 관점을 표방하고 있다. 이것을 명심하라. 육체에는 아무 것도 잘못된 게 없다.
나는 육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육체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다만 육체를 전부라고 여기는 그 생각이 추한 것이다.
인간은 일곱 개의 칸을 가진 사다리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첫번째 칸에 동일시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데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사다리는 이 세상과 피안(彼岸)의 세계를 이어준다. 이 사다리는 물질과 신을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사다리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사용되기만 한다면 첫번째 칸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만일 이 첫번째 칸을 딛고 올라갈 디딤돌로 여긴다면 이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이다. 이때 그대는 육체에 감사를 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다리의 나머지 여섯 부분을 잊고 오로지 첫번째 칸을 숭배하기 시작한다면, 사다리 전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첫번째 단계에 갇혀 버린다면,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그 칸은 더 이상 하나의 단계가 아니다. 하나의 단계는 다른 단계와 이어질 때에 한해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칸은 사다리 전체의 일부일 때에 한해서 칸이 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더 이상 칸이 아니라면 그대는 거기에서 막혀
버린다.
물질적인 사람들은 항상 경직되고 고착되어 있다. 그들은 항상 무엇인가 결여되었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원을 그리고 돌고있을 뿐이며 매번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그들은 지치고 권태를 느낀 나머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뭔가 자극적인 것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뭔가 새롭고 신선한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삶에 무슨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
가? 우리가 열중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장난감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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